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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천 이씨의 기원과 역사
합천 이씨의 뿌리는 신라가 건국되기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신라가 세워지기 전, 신라 6촌의 우두머리 촌장 중 한 사람이었던 표암공 알평은 기원전 57년 박혁거세를 왕으로 추대하였습니다.
신라의 세 번째 왕인 유리왕으로부터 '이'씨 성을 하사받았으며, 그는 경주 이씨, 전주 이씨 등 여러 이씨 성관의 시조가 되었습니다.
합천 이씨는 표암공 알평의 후손으로, 표암공을 모신 사당에서 경주 이씨와 경주 이씨에서 분파한 여러 가문과 함께 제사를 지내고 있습니다.
합천 이씨의 시조
합천 이씨의 시조는 강양군 이개입니다. 그는 표암공의 39세손으로 신라 말기에 태어나 문창후 최치원을 사숙하며 학문적으로 명성을 얻었습니다. 이후 벼슬길에 올라 한림의 자리에까지 올랐습니다. 또한,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의 사위가 되어 국가의 공신으로 인정받으며 강양군에 봉해졌습니다.
그러나 경순왕이 고려 태조 왕건에게 항복하면서 신라가 멸망하자, 강양군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겠다는 절의를 지키며 끝내 고려에 복속하지 않았습니다. 이로 인해 고려 조정으로부터 강등당하고 화를 입을 위기에 처했습니다.
이때 그의 18세 딸이 조정에 탄원하여 화를 면할 수 있었고, 강양군은 강양 호장으로 임명되었습니다. 그는 강양 일대를 다스리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았으며, 만루정사를 짓고 후학을 양성하였습니다. 이후 경순왕이 세상을 떠나자 깊이 슬퍼하다가 그도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합천을 본관으로 삼은 이유
합천 이씨가 본관을 합천으로 정한 것은 강양군이 강양 호장으로 임명되었기 때문입니다. 고려 태조가 실시한 호장 제도는 각 지역의 호장에게 지방 통치권을 부여하는 대신 가족 중 한 명을 고려 조정에 출사하게 하여 지방을 효율적으로 다스리도록 한 제도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같은 성씨를 가진 사람들이 많아지자, 구별하기 위해 본관을 정하게 되었습니다.
이를 통해 합천 이씨의 본관 시조에 대한 기록과 전승이 객관적이고 실증적인 근거를 바탕으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신라 말기 강양군에 봉해졌던 인물이 고려 태조 때 강양 호장의 직위를 가지게 된 과정이 과장 없이 사실적으로 전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시조인 강양군 이후 각 가문의 분파에 대해서도 정확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합천 이씨의 이러한 조상에 대한 합리적인 태도는 우리나라 토착 성씨인 이씨, 즉 경주 이씨의 잃어버린 선조 계보를 복원하는 데에도 큰 기여를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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