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청송 심씨 안효공파 항렬표 시조 조회
청송 심씨 안효공파 항렬표 시조 조회하기 ▶
청송심씨의 시조와 본관 유래
청송심씨는 고려 충렬왕 때 문림랑으로 위위시승을 지낸 심홍부를 시조로 모십니다. 그의 증손인 심덕부는 고려 우왕 때 문하찬성사에 이르렀으며, 청성부원군에 봉해졌다가 이후 청성충의백으로 진봉되었습니다. 후손들이 이를 따라 본관을 청송으로 정하였습니다.
청송은 경상북도 중부 동쪽에 위치한 지역으로, 본래 고구려 때 청기현이라 불렸습니다. 신라 시대에 적선으로 개칭되어 야성군에 속하였다가 고려 초에 부이현이 되었으며, 이후 운봉으로 이름이 바뀌고 예주에 포함되었습니다. 조선 태조 때 진보현과 통합되었다가 1419년 세조 원년에 청보군으로 승격되었습니다. 이후 다시 진보와 분리되었으며, 송생현과 합쳐 청송으로 개칭되었습니다. 이후 부로 승격되었고, 1895년 고종 32년에 군이 되었습니다.
심덕부는 태조 이성계를 도와 조선 개국에 기여하였으며, 청성백에 봉해졌습니다. 이후 판문하부사와 영삼사사를 거쳐 정종 즉위년에 좌정승에 올랐습니다.
그의 동생 심원부는 고려 말 여러 관직을 거쳐 전리판사에 이르렀습니다. 하지만 고려의 국운이 다하자 새 왕조의 벼슬을 거부하고 두문동에 들어가 절의를 지켰습니다. 후손들도 그의 뜻을 따라 대대로 벼슬에 나아가지 않는 전통을 유지하였습니다.
조선 개국 이후 청송심씨는 명문 가문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특히 심덕부의 아들 7형제 대에서 가문이 크게 번창하며 화려한 인맥을 형성하였습니다.
세종의 장인이었던 심온은 심덕부의 다섯째 아들이었습니다. 하지만 태종의 뜻에 거슬려 결국 왕명의 의해 목숨을 잃었습니다. 태종이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준 후에도 군사권을 장악하고 있었는데, 온의 막내동생 심청이 병권을 상왕이 쥐고 있는 것이 부당하다고 병조판서 박습에게 불만을 토로한 것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이 일이 태종에게 전해지면서 옥사가 발생하였습니다.
당시 좌의정이었던 박은이 “심온에게 인심이 쏠린다”고 고변하였고, 결국 심온은 영의정으로 명나라에 다녀오는 길에 의주에서 체포되어 한양으로 압송되었습니다. 이후 수원에서 사약을 받고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심온은 죽기 전에 “내 자손들은 대대로 박씨와 혼인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이후 심씨 가문에서는 그 유언을 지켜 박씨와 혼인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후손 중 심의와 심융이 박씨와 혼인하였는데, 그들의 자손은 번성하지 못하거나 아들이 없었다고 전해집니다.
- Total
- Today
- Yesterday
- 밀양 손씨 항렬
- 대구 서씨 항렬표
- 대구 서씨 족보
- 경주 손씨 족보
- 밀양 손씨 족보
- 충주 박씨 족보
- 영산 신씨 항렬
- 무안 박씨 족보
- 밀양 박씨 규정공파 항렬
- 순천 박씨 족보
- 이천 서씨 항렬
- 여흥 민씨 항렬표
- 고령 박씨 항렬
- 고령 신씨 항렬
- 달성 서씨 항렬표
- 순창 설씨 족보
- 창녕 성씨 족보
- 삼척 심씨 항렬
- 무안 박씨 항렬
- 삼척 심씨 시조
- 창녕 성씨 항렬
- 달성 서씨 족보
- 청송 심씨 안효공파 항렬표
- 경주 손씨 항렬
- 이천 서씨 족보
- 영산 신씨 족보
- 고령 신씨 족보
- 밀양 박씨 규정공파 족보
- 순천 박씨 항렬
- 고령 박씨 족보
일 | 월 | 화 | 수 | 목 | 금 | 토 |
---|---|---|---|---|---|---|
1 |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 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