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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산 신씨 족보 항렬 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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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산 신씨의 유래와 인물

영산 신씨의 시조인 신경은 고려 시대에 중국에서 우리나라로 건너온 8학사 중 한 사람입니다. 그는 고려 인종 때 문하시랑평장사에 올랐으며, 이후 경상남도 창녕군 영산면에 정착하였습니다. 신씨 가문은 9세손 때 영산과 영월로 본관이 나뉘었으며, 2000년 기준으로 영산 신씨는 83,798명, 영월 신씨는 67,489명으로 영산 신씨가 더 많습니다. 최근 발견된 신경의 4세손 신몽삼의 묘비에는 ‘태사공영주신지묘’라고 기록되어 있어, 원래는 영주 신씨였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고려 말 홍건적의 난 당시 신부와 신순 등 충신들이 활약하였습니다. 또한, 우리나라 성리학의 개척자 중 한 사람인 신천도 뛰어난 학자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그는 안향의 문하에서 학문을 익혔으며,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을 설립하였고, 동국공맹으로 불리는 17인의 학자 중 한 명으로 꼽힙니다. 이외에도 수군절도사 신식과 병마절제사 신을화 등이 신씨 가문의 후손입니다.

 



영산 신씨 가문에서는 고려 말 정치승려인 신돈이 배출되었습니다. 그는 공민왕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으며 정치와 종교 권력을 장악하였습니다. 공민왕 15년에는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하고 판사로 취임하여 문란한 토지 제도를 개혁하고 농민의 권익을 보호하며 국가 재정을 확충하는 데 힘썼습니다. 하지만 결국 권력 남용으로 인해 인망을 잃었으며, 역사적으로 부정적인 인물로 기록되었습니다.

 



조선 시대에는 태종 때 지중추부사를 지낸 신균과, 정용호군으로서 25차례나 왜구와 싸운 신유정이 활약하였습니다. 세종 시대에는 집현전 학사로 등용된 신석조가 세종실록, 경국대전, 의방유취 등의 편찬에 참여하였습니다. 신인손은 사관으로서 여러 대군과 함께 서사를 강론하여 세종의 총애를 받았으며, 형조판서와 예문관대제학을 지냈고 글씨에도 뛰어났습니다.

김종직의 문인인 신영희는 과거에 급제하였으나 벼슬을 버리고 학문에 전념하였습니다. 명종 시대에는 신륜과 신응시가, 선조 시대에는 신경진이, 광해군 시대에는 신광업과 신경연이 뛰어난 인물로 평가받았습니다. 신계영은 외교관으로서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였으며, 인조 2년에는 일본에 붙잡혀간 146명의 포로를 데려왔습니다. 또한, 인조 17년에는 볼모로 잡혀간 세자를 맞으러 심양으로 갔으며, 효종 3년에는 사은부사로 청나라에 다녀오기도 하였습니다.

근대에는 독립운동가 신태악이 이승만과 함께 독립운동에 헌신하였으며, 신공제는 3·1운동 이후 일제 경찰의 탄압을 피해 중국으로 망명하였습니다. 신영락은 3·1운동 당시 경남 창녕에서 결사대를 조직하여 독립운동에 투신하였습니다.

영산 신씨 가문에서는 유명한 목가시인 신석정도 배출되었습니다. 그는 1907년 전북 부안에서 태어나 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서울로 올라와 중앙불교전문강원에서 불경을 연구하였습니다. 이후 1931년 시문학 동인으로 참여하면서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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