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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 마씨 족보 항렬 조회

 

장흥 마씨 항렬 족보 조회하기 ▶

 

 

마씨(馬氏)의 시조는 마완이십니다. 마완은 은나라 양성인으로 학식과 덕행이 높은 군자였습니다. 은나라 말기에 마완과 그의 아들 마장은 주왕의 폭정으로 인해 혼란스러운 세상을 피해 경서를 가지고 은거하였습니다. 이후 은나라가 멸망한 후 마장은 기자와 함께 조선에 처음으로 동래하였습니다. 따라서 마씨는 동래조인 마장에서 비롯되었으나, 옛 법도에 따라 마장의 부친인 마완을 시조로 모시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은나라는 중국의 고대 왕조로 알려져 있으나, 1928년부터 1936년까지 진행된 은허(殷墟) 발굴을 통해 은족은 전형적인 동방 조선족 계열의 동이족이라는 것이 현대 중국 학자들의 통설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따라서 마씨는 고조선에 뿌리를 둔 가장 전통적인 고성으로 추정됩니다. 다만, 은족의 계보에 대해서는 향후 더 정확한 고증을 기다리고자 합니다.

 



서기 기원전 18년에 마려, 오간, 전섭 등 10인이 온조를 도와 졸본부여를 떠나 남쪽으로 이동하였습니다. 그들은 위례성(현재 경기도 남한산)에 도읍을 정하고 십제를 건국하였으며, 온조를 왕으로 받들었습니다. 온조왕은 개국 원훈인 마려에게 좌보의 벼슬과 함께 마사량현을 식읍으로 내렸으며, 후손들은 이곳에서 대대로 세거하였습니다.

 



마사량현은 고려 초기 회령으로 명칭이 변경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본관을 회령으로 하였으나, 고려 인종 때 회령이 장흥에 속하게 되면서 다시 본관을 장흥으로 하였습니다.

백제를 건국한 시조는 온조왕이며, 그의 부친은 주몽입니다. 주몽은 북부여에서 피난하여 졸본부여에 이르렀고, 당시 졸본부여 왕은 아들이 없었습니다. 왕은 주몽의 비범함을 알아보고 자신의 둘째 사위로 삼았습니다. 이후 왕이 별세하자 주몽이 왕위를 계승하고 두 아들을 두었는데, 장자는 비류, 차자는 온조였습니다. 그러나 주몽이 북부여에서 낳은 유리를 태자로 삼으면서, 비류와 온조는 태자로 책봉되지 못할 것을 우려하여 마려, 오간 등 10신과 함께 남쪽으로 이동하였습니다.

이들은 한산에 도착하여 도읍지를 찾았으며, 비류는 해변에 거주하고자 하였으나, 10신들은 현재의 하남 지역이 한수를 끼고 있어 지형적으로 유리하다고 조언하였습니다. 그러나 비류는 이를 따르지 않고 미추홀로 향하였고, 온조는 하남 위례성에 도읍을 정하여 10신과 함께 십제국을 세웠습니다. 이때가 기원전 18년입니다. 이후 비류는 미추홀의 환경이 좋지 않음을 깨닫고 위례성으로 돌아왔으나, 이미 도읍이 안정된 것을 보고 부끄러워하다가 결국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백성들은 모두 위례성으로 합류하였으며, 이후 백제라는 국호가 확립되었습니다.

본래 백제의 마사량현이었던 지역은 신라 경덕왕 때 대로현으로 개칭되어 보성의 영현이 되었습니다. 고려 시대에는 다시 회령으로 불렸으며, 조선 태종조에 장흥에 속하게 되었습니다.

백제 때 오차현으로 불리던 지역은 신라 시대 오아현, 고려 초 정안현으로 변화하였으며, 고려 인종조에 장흥으로 개칭되었습니다. 이후 원종조에는 회주로, 충선조에는 다시 장흥으로 변경되었습니다. 조선 태종 원년에 치소를 중령으로 옮겼으며, 태종 13년에는 다시 수령으로 이전하여 별칭으로 관산이라 불리기도 하였습니다.

동국여지승람을 참고하면, 본래 성씨에 회령마씨가 기재되어 있으며, 초기 족보도 회령을 본관으로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후 회령이 장흥으로 개칭되면서 본관 역시 장흥으로 변경되었습니다.

옛 족보를 살펴보면, 호장공 작룡 이상의 3대 묘가 수령 백남산에 위치한 것으로 전해지며, 장흥읍 인근에 마정승의 묘소가 있었다고 전합니다. 호장공의 손자인 동강공 수손은 평장사에서 물러난 후 예양강 위에서 생활하였으며, 호를 동강은사라 하였습니다. 그의 증손인 충정공 천목은 회령 봉림산 밑 모원촌에서 태어났으나, 어릴 때 곡성군 오지면 당산촌으로 이주하였습니다. 충정공의 둘째 아들인 조은공 전은 1456년 병자년에 내양강 위에서 생활하였으며, 호를 조은이라 하였습니다.

이를 종합해 보면, 회령과 수령은 서로 인접한 지역이며, 호장공과 그 후손들이 회령과 수령을 오가며 생활하였음이 명확합니다. 또한, 조은공이 다시 수령에서 거주하였음이 확인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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