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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양 남씨의 기원에 대해 설명드립니다.
시조
현재 남씨의 3관 4파는 모두 시조를 남민(南敏)으로 하고 있으며, 그의 중국 도래설을 정설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중국 도래설에 따르면, 755년(신라 경덕왕 14년) 당나라 사신 김충(金忠)이 일본에서 돌아오던 중 폭풍을 만나 영양 축산 죽도에 표착하였습니다. 당시 당나라는 안사의 난으로 인해 혼란스러운 상황이었고, 김충은 당 천자에게 신라에 거주할 수 있도록 허락해달라고 청하였습니다. 이에 천자가 이를 허락하였고, 경덕왕이 김충에게 영양을 식읍으로 하사하며 성을 남(南)으로 주고 이름을 민(敏)으로 지어주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기원에 대한 구체적인 근거는 명확히 제시되지 않았으나, 남씨 족보가 체계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사고(士高) 시대에 확립된 것으로 추측됩니다. 사고의 출생년도가 1509년임을 고려하면, 김충의 축산 죽도 표착 이후 약 750년이 흐른 셈입니다. 하지만 과연 750년 동안 남민의 이야기가 이렇게 구체적으로 전해질 수 있었을지는 의문입니다.
계유보 수권(首券) 176쪽에 있는 몽뢰 가첩(夢賚 家牒)에 따르면, 의령 후손 연년(延年)은 중국 도래설이 사고의 가설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몽뢰 가첩은 최소한 1622년 이전에 만들어진 남씨 최고(最古)의 족보 중 하나로 보입니다. 또한, 같은 책 177쪽에서 병암(屛巖)은 중국 도래설이 실증적으로 고증되었을 때 신빙성이 부족함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시조 남민이 중국에서 건너왔고 본명이 김충이었다는 것은 모순이 있습니다. 김씨는 신라 시대부터 내려온 한국 고유의 성씨로, 다른 나라에는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일부 기록에 따르면, 2007년 4월 중국 하남성 여남현의 정치협상회 부주석이었던 진중쩌우(金鐘照) 씨가 한반도에 정착한 조상 김충을 찾기 위해 한국을 방문한 바 있습니다.
남민이 최초로 거주한 곳이 축산(丑山)이라고 하며, 축산에는 남민과 그의 후손들이 살았다는 '김이부동'이라는 마을 이름이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만약 남민이 한반도에 도착한 당대에 영양을 식읍으로 받았다면, 왜 영양현으로 가지 않고 바닷가의 작은 어촌에 계속 머물렀을까요?
이 이야기는 강한 유교적 색채를 띠고 있습니다. 김충이 중국 출신이라는 점에서 모화사상(慕華思想)이 나타나며, 왕으로부터 직접 성을 하사받고 이름을 바꾸었다는 점에서 권위주의적 유교 정신이 반영되었습니다. 이러한 내용은 유학자인 사고가 생각할 수 있는 전형적인 구조일 뿐만 아니라 조선 시대 유학자의 한계를 보여줍니다. 그러나 사고는 김씨 성이 한국 고유의 성씨라는 점과 당시 신라와 중국의 관직명 및 사신 왕래에 대한 실증적 고증을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따라 남씨의 시조는 원래 영양 김씨였을 가능성이 큽니다. 이를 뒷받침하는 근거로는 남씨가 현재까지 영양 김씨와의 혼인을 금하고 있다는 점이 있습니다. 이는 남씨와 영양 김씨가 같은 혈통임을 의미합니다. 또한, 정유보 수권 54쪽에 따르면 남민이 처음 살았던 마을을 사람들이 '김이부동'이라고 불렀다는 점도 남씨가 김씨에서 유래했음을 시사합니다. 사고가 아무 근거 없이 갑자기 남씨가 김씨에서 나왔다고 주장했을 리 없으며, 그 당시 사람들이 이를 받아들였다는 점도 이를 뒷받침합니다. 남씨는 고려 시대에 성을 김씨에서 남씨로 바꾼 것으로 추정됩니다. 신라 시대에는 김씨가 귀족의 성씨였으므로, 김씨에서 남씨로 바꾸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기원
현재 남씨의 각 파별 시조는 영양파는 홍보(洪補), 안동파와 의령파는 군보(君甫), 고성파는 광보(匡甫)입니다. 남아 있는 자료를 토대로 판단했을 때, 홍보·군보·광보가 형제였다는 설에는 근거가 없습니다. 이들의 이름 끝자가 비슷하고 발음이 유사하여 형제일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지만, 객관적 증거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1425년에 사망한 광보의 6세손 영번(永蕃)이 약 60세까지 살았다고 가정하면, 그의 출생연도는 1360년경으로 추정됩니다. 그의 아버지 승고(承顧)가 30세 무렵에 영번을 낳았다면, 승고는 1330년경 출생한 셈입니다. 광보는 승고의 5대조 할아버지입니다.
계유보 수권 433쪽에 따르면, 1372년(공민왕 21년) 작성된 휘주(暉珠) 묘의 광기(壙記) 및 437쪽의 1390년(공양왕 2년) 호적 기록에 따르면, 군보는 휘주의 5대조 할아버지로 확인됩니다. 휘주가 약 60세까지 생존했다고 하면, 그의 출생 연도는 1310년경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를 고려하면, 광보와 군보는 비슷한 시기에 살았거나 많아야 한 세대 차이가 나는 것으로 추측됩니다. 이들의 출생 연도는 1150년 전후일 것으로 보입니다.
같은 책 412쪽에서는 의령 후손 태보(泰譜)가 남긴 기록에서, 백운 이규보(白雲 李奎報, 1168~1241)의 친구 중에 고성 본관 남씨가 있었다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는 1200년경에 이미 고성파가 형성되었음을 시사합니다. 일반적으로 고성파가 가장 나중에 형성되었다는 점은 모두가 동의하는 바입니다. 따라서 1200년 이전에 이미 영양파, 안동파, 의령파가 존재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남씨의 실질적인 기원은 최소한 1200년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일부에서는 홍보·군보·광보의 관직 명칭이 충선왕(1308~1313) 이후에 등장한 것이므로, 이들이 충선왕 이후에 관직을 지녔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이를 다시 검토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만약 이들이 충선왕 이후에 활동한 인물이라면, 군보의 5대손인 휘주가 1372년에 사망하고, 광보의 6대손 영번이 1425년에 사망한 사실을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예를 들어, 안기부가 정보부로 명칭이 변경된 후 50년 정도가 지나 어떤 사람의 할아버지가 과거 안기부장이었다면, 그의 손자는 할아버지를 정보부장이라고 부를까요, 아니면 여전히 안기부장이라고 부를까요? 이처럼 후대에서 당시 사용된 관직명을 기준으로 조상을 평가하는 것은 신중하게 접근해야 할 문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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