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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 나씨 족보 항렬 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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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부는 고려 시대에 중국에서 건너와 정의대부와 감문위상장군을 지낸 후 나주에 정착하였습니다. 후손들은 그를 시조로 삼아 나씨 성을 사용하였으며, 여황나씨라고 불렸습니다. 이후 고려 성종 때 지명이 여황에서 나주로 변경되면서 본관을 나주로 정하게 되었습니다. 나주의 다른 이름인 금성을 본관으로 하는 금성나씨와는 뿌리가 다릅니다. 구분을 위해 나주나씨를 당라, 금성나씨를 토라라고 부릅니다.

 



나주나씨의 1세조는 나득규이며, 고려 시대에 진사를 지낸 4세조 나수영의 아들 나 위, 나 계, 나 석, 나 세, 나 원의 후손들이 전서공파, 시랑공파, 금양군파, 연안군파, 직장공파 등 5개 파로 나뉘었습니다.

 



나중소는 한일합방 이후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였습니다. 1919년 김좌진, 서 일 등과 함께 북로군정서를 창설하고 참모장을 맡았으며, 독립군 양성을 위해 사관양성소를 설치하였습니다.

 



대종교의 초대 교주인 나 철은 1863년 전라남도 보성군 벌교읍 칠동리 금곡부락에서 태어났습니다. 1891년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승정원 가주서가 되었으나, 일본의 침략이 심해지자 관직을 사임하고 호남 출신의 우국지사들을 모았습니다. 1904년 유신회라는 비밀 단체를 조직하여 구국 운동을 펼쳤으며, 1909년 단군을 모시는 제천 의식을 행하고 단군 교포명서를 공포하였습니다. 이를 계기로 이날을 중광절이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이후 교세가 확장되어 교도 수가 2만여 명에 이르렀지만, 1915년 조선총독부는 대종교를 독립운동 단체로 규정하고 본사를 강제로 해산시켰습니다. 결국 나 철은 1916년 구월산 삼성사에서 유서를 남기고 순국하였습니다.

나혜석은 화가이자 소설가로 유명합니다. 1921년 한국 여류 화가로는 최초로 개인전을 열었으며, 1918년에는 ‘경희’, ‘정순’ 등의 단편소설을 발표하며 여류 소설가로도 활동하였습니다. 개화기의 대표적인 여성 인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조선 시대 과거 급제자로는 나세찬, 나만영, 나사선, 나신국, 나순영 등이 있으며, 문과 급제자 28명, 무과 급제자 29명, 사마시 급제자 102명 등 총 159명이 있습니다.

현대 인물로는 나웅배(부총리, 국회의원), 나중배(육군 대장), 나도석(서울농대 교수), 나운영(연세대학교 학장, 작곡가), 나종일(문학 박사, 서울대학교 교수), 나길조(대법원 판사, 변호사), 나천수(서울고등법원 판사), 나이수(국회의원), 나창수(한국기계공업진흥회 부회장), 나준수(정치학 박사, 독일대 교수), 나종수(판사), 나도성(재무부 이사관), 나용수(국방대학교 교수), 나갑수(국방대학교 교수), 나민수(국세청 국장), 나정웅(교수), 나상동(조선대학교 교수), 나종주(기업 대표), 나채규(판사), 나금만(총경), 나영옥(총경), 나익진(상공부 장관 서리), 나호진(검찰 지청장, 변호사), 나형수(검사), 나용주(전북도 노동국장), 나상목(동양화가, 동국대학교 교수), 나종훈(판사), 나교희(단양군수, 중원군수), 나영균(문학 박사, 이화여대 교수), 나병직(대통령 비서관), 나종열(정보부 비서관), 나명원(교수), 나필열(정치학 박사, 교수), 나형열(신학 박사, 교수), 나숭열(검사), 나도헌(의학 박사, 보건복지부 차관), 나도영(공주대학교 교수), 나도상(조달청 국장), 나항윤(대법원 판사, 변호사), 나종오(국민대학교 교수), 나규환(약학 박사, 성균관대학교 교수), 나병선(육군 소장), 나상무(이학 박사, 아주대학교 교수), 나희필(육군 중장), 나기봉(기업 대표), 나주택(익산군수), 나상윤(서울역장), 나지수(기업 대표), 나선수(판사) 등이 있습니다.

나주나씨의 항렬자는 23세는 집, 24세는 도, 25세는 균·규·기, 26세는 종·옥·정, 27세는 영·수·철, 28세는 상·영·식, 29세는 엽·희·연, 30세는 중·현·재, 31세는 선·탁·일, 32세는 문·호·홍, 33세는 표·근·주, 34세는 용·찬, 35세는 배·곤·기, 36세는 은·철·용, 37세는 영·태·식, 38세는 병·평·채, 39세는 휴·렬·걸입니다.

나주는 전라남도 나주시 지역으로 백제 시대에는 발라군으로 불렸으며, 이후 죽군성으로 명칭이 변경되었습니다. 백제 멸망 후 당나라가 이곳에 대방주를 설치하였으며, 686년 신라 신문왕 때 통의군으로, 757년 경덕왕 때 금산군 또는 금성군으로 불렸습니다. 940년 고려 태조 때 나주로 개칭되었고, 고려 성종 때 나주목이 설치되었습니다. 1895년 지방제도 개편으로 나주부가 되었으며, 1981년에는 나주읍과 영산포읍이 통합되어 금성시로 승격되었습니다. 1985년 금성시가 나주시로 변경되었으며, 1995년 나주시와 나주군이 통합되었습니다.

나주 본관 성씨로는 나주강씨, 나주김씨, 나주나씨, 나주내씨, 나주노씨, 나주독고씨, 나주류씨, 나주문씨, 나주박씨, 나주방씨, 나주배씨, 나주백씨, 나주서씨, 나주성씨, 나주손씨, 나주송씨, 나주신씨, 나주아씨, 나주양씨, 나주엄씨, 나주염씨, 나주오씨, 나주이씨, 나주임씨, 나주장씨, 나주전씨, 나주정씨, 나주조씨, 나주주씨, 나주진씨, 나주차씨, 나주추씨, 나주한씨, 나주호씨, 나주홍씨, 나주황씨 등이 있습니다.

전국의 나주나씨 인구는 1985년에는 23,284가구, 99,090명이었으며, 2000년에는 33,600가구, 108,139명으로 증가하였습니다. 1985년 당시 전남 지역에 가장 많은 인구가 분포해 있었으며, 2000년에는 광주, 전남, 전북 지역에 많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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