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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 한씨 항렬표 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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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충청북도 청주를 본관으로 하는 성씨입니다.

 



[연원]
한씨(韓氏)는 기자조선에 그 기원을 두고 있습니다. 위만에게 밀려 마한으로 온 준왕(準王)[기자(箕子)의 40대 후손]의 8세손인 원왕(元王)은 세 아들을 두었으며, 그중 둘째 아들인 우량(友諒)이 신라의 상당(上黨)[청주의 옛 지명]으로 옮겨 정착하며 한씨 성을 사용하였다고 전해집니다.

 



사적에 따르면 한씨의 시조는 기자의 후손인 우량의 32세손 한란(韓蘭)[?~?]입니다. 한란은 고려 태조(太祖)가 후백제의 견훤(甄萱)을 정벌할 때 청주에서 군량미를 지원하여 삼한 통합에 공헌하였으며, 이功으로 개국벽상공신에 책록되어 삼중대광태위(三重大匡太尉)에 올랐습니다. 그는 청주 방정리에 정착하였으며, 후손들은 청주를 본관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습니다.

 



현재 방정리(方井里)는 행정구역상 방서동으로 변경되었으나, 오래전부터 ‘대머리’라는 이름으로 통용되고 있습니다. 청주한씨(淸州韓氏)를 ‘대머리한씨’라 부르게 된 유래는 명확하지 않지만, ‘대머리’는 ‘대인(大)’과 마을을 뜻하는 ‘멀(마을의 방언)’이 결합된 단어로서, ‘대멀’이 변형되어 ‘대머리’로 불리게 되었다고 전해집니다. 즉, 시조인 태위공(太尉公)과 같은 위대한 인물이 살던 마을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청주한씨분관연원록』에 따르면 후손이 번창하면서 세거지명이나 봉군(封君)된 지역을 본관으로 삼아 15개 분파로 나뉘었으나, 현재는 다시 청주한씨로 환적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습니다.

[세거지]
시조 태위공 한란 이후로 후손들은 이른바 ‘대머리’ 지역에서 번성하였으며, 고려 시대부터 벼슬을 하면서 21개 분파가 형성되어 전국적으로 세거지가 분포하게 되었습니다. 1930년대 기준 상당구 방서동에는 200가구가 있었으며, 2005년에는 93가구가 거주하고 있습니다. 또한, 청원군 남이면 가좌리에는 1930년대 30가구가 살았으며, 2005년에는 14가구가 남아 있습니다.

2000년 인구조사에 따르면 청주에는 2,930가구, 9,727명이 거주하고 있으며, 청원에는 571가구, 1,877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집성촌]
정랑공파 계열의 23세손 한진영(韓震英)은 1618년(광해군 10) 청주 방정리에 정착하여 현재 상당구 방서동과 청원군 남일면 효촌리 일대에 대머리한씨의 집성촌을 형성하였습니다. 전성기에는 200여 가구가 거주하였으며, 현재는 93가구가 남아 있습니다.

또한, 절제공파 계열의 18세손 한윤형이 중종 때 전라북도 정읍에서 충청북도 청원군 남이면 가좌리와 양촌리로 이주하여 집성촌을 이루었습니다.

[인물]
청주한씨는 단본 성씨로 고려 초기부터 명문으로 부상하였으며, 조선 시대에는 문과 급제자가 273명에 이를 만큼 많은 인물을 배출하였습니다. 2000년 전국 인구조사에 따르면 청주한씨 인구는 19만 9,624가구, 64만 2,992명으로 집계되었습니다.

한상경(韓尙敬) [1360~1423]: 고려 우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우정언과 종부령을 역임하였으며, 공민왕 시절 이성계(李成桂)를 도와 조선 건국에 기여하여 개국공신 3등에 책록되었습니다. 이후 태종 때 우의정과 영의정을 지냈습니다.
한계미(韓繼美) [1421~1471]: 조선 시대 문신으로 1452년 수양대군(首陽大君)을 따라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세조(世祖) 즉위 후 좌익공신 3등에 책록되었습니다. 우승지, 호조참판, 이조판서를 역임하였으며, 1467년 평안도 병마절도사로 부임하여 이시애(李施愛)의 반란을 평정하였습니다. 1470년 서원부원군에 봉해졌으며, 좌리공신 2등에 책록되고 영중추부사를 지냈습니다.
한명회(韓明澮) [1415~1487]: 조선의 문신으로 수양대군의 측근으로 활약하며 계유정난에 공을 세워 정난일등공신이 되었습니다. 세조 즉위 후 좌익일등공신에 책록되었으며, 이조판서를 거쳐 상당군에 봉해졌습니다. 이후 좌의정과 영의정을 역임하였습니다.
한백겸(韓百謙) [1550~1613]: 청주목사를 지내면서 1605년(선조 38) 시조 한란을 기리기 위해 재당(齋堂)을 건립하고 ‘청주한씨시조유기서사비’를 세웠으며, 비문은 동생 한준겸(韓浚謙)이 찬하였습니다.
한원진(韓元震) [1682~1751]: 1725년(영조 1) 경연관으로 선발되었으며, 호서 지역에서 활동하면서 인물성상이론(人物性相異論)을 주장한 성리학자입니다. 저서로 『주서동이고(朱書同異考)』가 있습니다.
한봉수(韓鳳洙) [1883~1972]: 청주 출신 의병장으로, 1907년 군대 해산 이후 의병을 모집하여 청주 근교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습니다. 전의, 평택, 여주, 횡성, 문경 등에서 활동하였으며, 3·1운동 당시 청주에서 민중을 이끌다 체포되어 2년간 복역하였습니다. 1963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단장이 수여되었습니다.
[묘역]
청주한씨 시조 한란의 묘소와 신도비는 충청북도 청원군 남일면 가산리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또한, 청주한씨시조제단비는 상당구 운동리에 있으며, 1605년에 건립된 이 비에는 시조 한란과 후손들의 내력 및 유기(遺基) 발견 사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무농정(務農亭)**은 상당구 방서동(옛 방정리) 언덕에 있는 정자로, 시조 태위공이 농민들에게 농사의 중요성을 강조하던 자리로 알려져 있습니다. 1688년(숙종 14) 무농정유허비가 세워졌으며, 그 아래에는 한씨 시조 태위공이 사용하던 네모난 우물이 남아 있습니다. 이 우물로 인해 해당 지역이 방정리(方井里)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는 전설이 전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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