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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강씨 박사공파는 17세기 초, 약 400여 년 전 예산군 신양면 대덕리와 청양군 운곡면 광암리·미량리 일대에 입향하여 현재까지 세거하고 있습니다.
진주강씨는 고구려 말기에 을지문덕 장군과 함께 수(隋)나라의 침략을 막고 살수대첩을 승리로 이끈 도원수(都元帥) 강이식(姜以式)을 시조로 모시고 있습니다. 고구려 멸망 이후 당나라 황제가 실시한 과거에서 강진(姜縉)이 장원급제한 후 태중대부판내의령(太中大夫判內議令)을 역임하였으며, 이후 진양후(晋陽候)에 봉해지면서 본관을 진주(晉州)로 하게 되었습니다. 강씨의 본관은 문헌상 진주, 금천, 안동, 백천, 해미, 동북, 광주 등 7본(本)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모두 진주강씨의 지파로 여겨집니다. 따라서 강이식이 모든 강씨의 도시조(都始祖)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진주강씨는 크게 다섯 개의 파(派)로 나뉘며, 박사공파는 국자박사(國子博士)를 지낸 강계용(姜啓庸)을 중시조(中始祖)로 모시고 있습니다. 강계용은 원종 15년(1274), 원나라가 일본을 공격할 당시 통신사(通信使) 서장관(書狀官)으로 활약하였으며, 이때부터 1세로 계대(計代)하고 있습니다. 강계용의 손자인 강사첨(姜師瞻)이 감찰어사(監察御史)를 지냈기에 ‘어사공파’라고도 하며, 7세 강회중(姜淮仲)의 호 ‘통계(通溪)’를 따서 ‘통계공파’라고도 합니다. 또한 8세 강안복(姜安福)이 병조참판에 증직되었기에 ‘참판공파’라고도 불리고 있습니다.
강안복은 아들 아홉 명[利纘·利仁·利誠·利敬·利順·利行·利興·利溫·利恭]을 두었으며, 이들이 박사공파의 번창에 크게 기여하였습니다. 강이찬(姜以燦, ?1492)의 아들 강지(姜漬, 14531517, 호: 慕庵)는 중종반정에 공을 세워 정국공신(靖國功臣)으로 책봉되었으며, 부친과 함께 영선군(永善君)에 봉해졌습니다. 또한 왕명으로 초상을 벽상(壁上)에 그리게 하고 사전(賜田) 100결을 하사받았습니다. 강지가 세상을 떠나자, 중종은 예조좌랑 임권(任權)을 보내어 조문하게 하였으며 병조판서로 증직하고 소정(昭靖)이라는 시호를 내렸습니다.
중시조 강계용 이후 3세 강사첨까지의 설단(設壇)과 4세 강창귀(姜昌貴)의 묘소는 경상남도 합천에 있으며, 5세 강군보(姜君寶) 이후 12세 강질(姜礩, 1508~1571, 사헌부 집의)까지의 묘소는 경기도 고양, 양주, 광주 등지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진주강씨 박사공파는 예산군 신양면 대덕리, 청양군 운곡면 미량리·광암리·추광리, 그리고 남양면 일대에서 세거지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예산·청양 지역으로의 입향은 강질의 아들들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강질은 여섯 아들[13세, 應時·應運·應明·應吉·應亨·應平]을 두었으며, 이 중 셋째 강응명(姜應明, 1535~1606, 선략장군 행용양위부사직)의 묘가 신양면 대덕리에 있고, 다섯째 강응형(姜應亨, 호: 中正, 통덕랑)의 묘가 청양군 운곡면 미량리에 자리하고 있어 이들이 예산·청양 지역의 입향조로 볼 수 있습니다.
강응명의 세 아들[14세, 秀崦·秀嶪·秀崙] 가운데 강수엄(姜秀崦)의 후손들은 대덕리에 정착하여 무반(武班) 출신을 다수 배출하였으나, 둘째 강수업(姜秀嶪)과 셋째 강수륜(姜秀崙)의 후손들은 4~5세 이후 서천 지역으로 이주하였습니다. 또한 강응형의 후손들도 14세부터 부여, 김포 등지로 이동하였습니다.
강질의 둘째 강응운(姜應運, 15321568, 彰信校尉)의 첫째 아들 강수헌(姜秀巘, 15621602)의 후손들은 운곡면 미량리에 정착하였으며, 둘째 강수곤(姜秀崑, 15551620, 임진왜란 당시 호종한 이조참판)의 묘소는 본래 광주에 있었으나, 1968년부터 그의 후손 강원록(姜元祿, 15961663, 동몽교관), 아들 강선여(姜善餘, 15741647, 百千窩), 손자 강성거(姜聖擧, 16131675, 용양위부사과)의 묘를 광암리로 이장하였습니다.
강질의 넷째 아들 강응길(姜應吉, 생원, 효자)의 둘째 강수대(姜秀岱)의 묘는 신양 대덕리에 있으나, 그의 후손들은 3~4대 이후 청양, 홍주, 대흥 등의 지역으로 옮겨갔습니다. 또한 강질의 여섯째 아들 강응평(姜應平)의 6세손 강제영(姜齊英) 이후로는 모곡리와 신대리에서 세거하였습니다.
현재 광주에 묘가 있는 강수곤은 선조(宣祖)의 비(妃) 의인왕후(懿仁王后)와 이종(姨從) 사촌 관계였으며, 임진왜란 당시 선조를 의주까지 호종하였습니다. 또한 정약용(丁若鏞)의 『목민심서(牧民心書)』에는 그가 전란 중 고창현감(高敞縣監)으로 재직하며 유랑민을 구휼했던 사실이 기록되어 있어 그의 인품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강수곤의 아들 강선여는 1610년(광해군 2) 문과에 급제한 후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으며, 1627년 관직에서 물러난 후 청양에서 거주하였습니다. 1628년 명나라 16대 황제 의종(毅宗, 연호: 崇禎)으로부터 공자(孔子)의 화상을 받아 광암리에 봉안하였으며, 이로 인해 ‘수사(洙泗)’라는 지명이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조선 영조 때 편찬된 『여지도서(輿地圖書)』에 따르면, ‘수영동(水永洞)’과 ‘두암(斗巖)’이 합쳐져 현재의 ‘광암리’가 되었다고 전해집니다. 광암리에는 백덕재(百德齋)와 강선여의 신도비(神道碑), 봉환성상사적비(奉還聖像事蹟碑)가 남아 있으며, 공자를 모신 사당이나 서원이 있었던 흔적도 발견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광암리에 봉안되었던 공자의 성상은 대원군의 서원훼철령으로 인해 현재 백제문화체험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으며, 1993년 12월 24일 청양군 향토유적 제5호로 지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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