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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강씨 은열공파 족보 항렬 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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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열공 강민첨(姜民瞻) 장군은 고려 광종 14년(963년) 11월 29일, 진주의 옥봉산 아래 개경(開慶) 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현재 그곳은 경상남도 진주시 옥봉동에 위치한 은열사가 자리한 곳입니다.
은열공은 15세까지 진주 향교에서 학문을 부지런히 연마하였으며, 서당을 세워 고을의 청소년들에게 교육을 시키기도 하였습니다. 이후 진주에서 거주하다가 하동군 옥종면 두양리에 있는 우방산으로 거처를 옮겼으며, 그곳에 ‘원당(願堂)’이라는 집을 지어 조상의 업적을 기렸습니다. 43세에 과거에 급제하여 조정에 나아갈 때까지 우방산에서 생활하였으며, 현재도 그곳에는 은열공이 심었다고 전해지는 거대한 천년수가 위용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43세 때 문과에 급제하여 첫 벼슬인 장사랑(將仕郞)에 올랐으며, 당시 해동공자로 불리는 문헌공 최충과 함께 급제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비록 문과에 급제하였지만, 문무관직을 두루 역임하며 문무를 겸비한 관료로 인정받았습니다.
44세(1006년, 목종 9년)에는 문림랑(文林郞), 도교령 동정(都校令同正), 안변도호장 서기(安邊都護掌書記)를 맡았습니다. 도교령 동정은 고려 궁중에서 도구 제작과 세공을 담당하는 도교서의 직책으로 종8품 관직이며, 안변도호부는 군사적으로 중요한 거점에 설치된 행정구역으로 현재 함경도 안변에 해당합니다.
45세(1007년, 목종 10년)에는 국자주부 동정(國子主簿 同正)과 도호사록참군(都護司錄參軍)을 역임하였습니다. 국자주부는 고려 시대 고등교육기관인 국자감에서 종7품의 관직을 맡은 직책이며, 도호사록참군은 도호부에서 부사를 보좌하는 종7품 이상의 외직입니다.
47세(1009년, 목종 12년)에는 상식직장 동정(尙食直長 同正)을 지냈습니다. 상식국(尙食局)은 고려 궁중의 부식재료를 조달하는 관청이며, 직장은 정7품 관원에 해당합니다.
48세(1010년, 현종 1년)에는 애수진장(陰守鎭將)으로 임명되었습니다. 애수진(陰守鎭)은 현재 함경남도 고원군 서쪽 지역에 해당합니다. 같은 해 11월, 거란 왕이 기병 40만 명을 이끌고 고려를 침략하여 고려의 행영도통사(行營都統使)인 강조(康兆)를 죽이고 평양성까지 진격하였습니다. 당시 평양성을 지키던 장수들이 항복하거나 도망가며 성안의 민심이 동요하였으나, 애수진장이던 은열공이 이를 듣고 휘하 장졸을 이끌고 평양성으로 달려가 9일간 성을 사수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거란군은 평양성에서 시간을 지체하였고, 결국 개경으로 진격하였으나 고려 왕은 이 9일간의 여유 덕분에 무사히 나주(羅州)로 피신할 수 있었습니다.
49세(1011년, 현종 2년)에는 도관시원외랑(都官試員外郞)에 임명되었으며, 비어대(排魚袋)를 하사받았습니다. 도관은 고려 시대 형부 소속 관청으로 노비의 부적(簿籍)과 소송을 담당하는 기관이며, 원외랑은 정6품 관직입니다.
50세(1012년, 현종 3년)에는 동여진(東女眞)이 영일(迎日)과 청하(淸河) 지역을 침범하자 도부서(都部署) 소속으로 출전하여 부주방어사(部州防禁使)로서 주군병(州郡兵)을 독려하며 적을 격퇴하였습니다.
51세(1013년, 현종 4년)에는 기거주서(起居註書), 내사사인(內史舍人), 호부시랑(戶部侍郞) 등을 역임하였습니다. 기거주서는 임금의 언행을 기록하는 종5품 관직이며, 내사사인은 종4품 관직으로 조선 시대 사간원의 관직과 유사합니다.
54세(1016년, 현종 7년)에는 이부사인(吏部舍人)으로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받았으며, 차파맹장군(次破孟將軍), 상기도위(上騎都尉) 등을 지냈습니다.
56세(1018년, 현종 9년)에는 태복경(太僕卿)을 역임하였으며, 이 해 거란 장수 소배압이 6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략하였습니다. 고려군은 강감찬을 상원수로 삼고, 은열공을 원수로 임명하여 방어전을 펼쳤습니다. 고려군은 영주의 흥화진에서 우피작전(牛皮作戰)을 펼쳐 적을 수장시키는 등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으며, 은열공은 자주(지금의 평남 자산) 남쪽에서 거란군을 공격하여 큰 피해를 입혔습니다. 이후 연주와 위주 등지에서 거란군을 추격하여 마침내 구주(龜州)의 반령에서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이는 우리나라 전쟁사에서 빛나는 ‘구주대첩’입니다. 하지만 은열공의 공적은 강감찬 장군의 업적에 가려져 역사에 널리 알려지지 못하였습니다.
57세(1019년, 현종 10년)에는 은청흥록대부(銀靑興祿大夫), 응양상장군(應揚上將軍), 상주국(上柱國)으로 발탁되었으며, 동지중추밀원사(同知中樞密院事)와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 등의 직책을 맡았습니다. 같은 해 12월 20일에는 추성치리익대공신(推誠致理翔戴功臣)에 봉해졌습니다.
58세(1020년, 현종 11년)에는 병부상서(兵部尙書)에 임명되었으며, 현릉 개장의 공로로 금자흥록대부(金紫興祿大夫)에 제수되었습니다. 현종은 병부상서를 제수하면서 태자태부(太子太傅)를 겸직하게 하였으며, 이를 통해 은열공의 학문적 깊이 또한 높이 평가받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59세(1021년, 현종 12년)에는 11월 12일 서거하였으며, 왕은 국장으로 장례를 치를 것을 명하였습니다. 묘소는 충청도 예산현 감천동에 마련되었으며, 조정에서는 3일 동안 조회를 열지 않았습니다. 공의 공로를 인정하여 그의 아들 강단(姜旦)에게도 녹자(祿資)가 내려졌으며, 문종 때 공신각에 그의 업적이 올려졌습니다.
조선 태종 역시 은열공의 공적을 높이 평가하며, 우방산과 두방산의 약 300정보의 땅을 하사하였습니다. 현재까지도 진주를 중심으로 한 은열공 후손들은 매월 초하루와 보름마다 그의 공덕을 기리며 제사를 봉행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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