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양 진씨 시조 항렬 족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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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양 진씨 가문은 오랜 역사와 전통을 지닌 성씨로, 고려 시대부터 중요한 인물들을 배출해온 명문 가문입니다. 고려 시기에 활동했던 매호 진화는 이규보와 나란히 평가될 만큼 뛰어난 문학가였으며, 임진왜란 당시에는 진무성 장군이 큰 공을 세운 인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날 전 세계에 약 1억 명 이상이 성씨 ‘진’을 사용하고 있으며, 이 가운데 여양 진씨는 뚜렷한 역사적 뿌리를 지닌 대표적인 집안으로 평가됩니다.
여양 진씨의 시조는 고려 예종 시기 활동한 진총후입니다. 그는 상장군이자 신호위의 대장군으로, 이자겸의 난을 평정한 공을 인정받아 여양군에 봉해졌습니다. 이로 인해 그의 후손들은 여양을 본관으로 삼게 되었습니다.
여양 진씨 대동보에는 진총후의 선조로 북송 시대 복주 출신이자 우윤이라는 벼슬을 지낸 진수라는 인물이 등장하기도 합니다. 이 진수가 요나라와 금나라의 침략을 피해 고려로 망명하여 충청남도 홍성 일대에 자리를 잡았고, 진총후는 그의 후손으로 전해지기도 하나, 이에 대한 확실한 증거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여양 진씨 대종회 역시 진총후가 진수의 후손이라는 점에 대해 후손들의 더 깊은 고찰을 권하고 있습니다.
현재 여양 진씨는 여양 외에도 경주, 신광, 삼척, 나주, 강릉, 홍주, 흥덕, 덕창, 남해, 여주, 진산 등 여러 지역에 본관을 두고 있었으나, 오늘날에는 대부분 여양으로 통합하여 나주, 강릉, 삼척파로 계파가 정리되어 전해지고 있습니다.
한편, 진씨라는 성을 사용하는 이들은 고려 초에도 존재했습니다. 예를 들어, 고려 태조 시절에는 반역죄로 처형된 진선이라는 인물이 있었고, 현종 대에는 거란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다가 돌아온 진적이라는 인물의 기록도 있습니다. 또, 묘청의 난과 관련해서도 진경보와 진숙이 부사로 출전했으며, 이후 고위직에 임명되거나 왕의 각별한 애도를 받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들 인물은 여양 진씨 족보에 이름이 나타나지 않으며, 다른 진씨 계통의 족보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아, 별개의 진씨 가문에 속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또한, 2013년 발굴된 중국 지역의 백제 유민 진법자의 묘지명을 통해 삼국시대에도 진씨 성을 사용한 인물이 존재했음이 확인되기도 했습니다. 그는 백제의 품달군이라는 지역에서 은솔이라는 관등을 지닌 인물로 추정되며, 오늘날의 충청남도 홍성군 일대가 그 활동 무대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이처럼 여양 진씨는 고려 시대를 중심으로 형성된 역사적 뿌리를 지니며, 다양한 분야에서 인물을 배출해 온 자랑스러운 가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