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흥 임씨 시조 족보 항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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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 임씨의 기원과 역사
장흥 임씨의 시조는 임호입니다. 임호는 중국 절강성 소흥부 출신으로, 고려 정종 때 고려로 온 것으로 추정됩니다.
당시 중국의 정세가 혼란스러워 고려로 이주한 임호는 배를 타고 장흥군 관산읍 천관산 아래의 임씨도에 도착한 후, 옥당리 당동마을에 정착하였습니다. 그는 상서공부원외랑이라는 벼슬을 지냈으며, 이후 원로대신에게 주어지는 높은 벼슬인 태자태부까지 올랐습니다.
고려 시대 장흥 임씨의 활약
임호의 아들인 임의는 고려 문종 24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문하시랑평장사를 거쳐 고려의 최고 관직인 수상 자리에까지 올랐습니다. 또한, 윤관 장군과 함께 여진족 정벌에 앞장서 큰 공을 세웠습니다. 그는 세 아들, 원숙, 원후, 원준을 두었습니다.
첫째 아들 원숙은 문과에 급제한 후 예부상서를 거쳐 중서시랑과 판호부사를 역임했습니다. 인품이 인자하고 강직했던 그는 문숙공파의 파조가 되었습니다.
둘째 아들 원후는 고려 중기의 명신으로 문하시중을 거쳐 수상에 올랐으며, 김부식과 함께 묘청의 난을 평정하는 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원후는 재상이 된 후에도 근검하고 청렴한 자세를 유지했으며, 그는 문충공파의 파조가 되었습니다.
셋째 아들 원준 역시 문과에 급제하여 중서시랑과 판형부사를 역임했습니다. 그는 정안공에 임명되었으며, 조세를 걷을 수 있는 식읍 600호를 하사받았고, 문헌공파의 파조가 되었습니다.
공예태후 임씨와 장흥의 유래
장흥 임씨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로 공예태후 임씨가 있습니다. 그녀는 원후의 딸로, 장흥군 관산읍 옥당리 당동에서 태어나 고려 17대 왕인 인종의 왕비가 되었습니다. 공예태후는 다섯 왕자와 네 공주를 낳았으며, 그중 세 아들이 차례로 왕위에 올라 18대 의종, 19대 명종, 20대 신종이 되었습니다.
당시 장흥 지역은 정안현이라는 이름으로 영암군에 속해 있었으나, 공예태후의 출생지로서 부로 승격되었습니다. 이후 ‘오래도록 흥한다’는 뜻을 담아 장흥이라는 이름이 붙여졌으며, 오늘날의 장흥군이 공예태후와 깊은 연관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장흥 임씨는 원래 정안 임씨로 불렸으나, 공예태후의 출생지인 정안현이 장흥도호부로 승격되면서 장흥 임씨로 개칭되었습니다.
조선 시대 장흥 임씨의 활약
장흥 임씨는 고려 시대에 이어 조선 시대에도 많은 인재를 배출했습니다. 원후의 아들 임유는 다섯 명의 임금을 섬기며 주요 관직을 역임했고, 불교를 신봉하며 대장경을 제작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그의 아들 임익은 충렬왕의 명을 받아 선원록을 편찬하고, 원나라 세조의 사적을 기록하였습니다.
임진왜란 때는 호남의병장으로 활약한 임계영과 임발영이 유명합니다. 임계영은 고향인 보성에서 의병을 모아 장수, 거창, 합천, 성주에서 왜군을 격파했습니다. 임발영은 임진왜란에서 2등 공신으로 인정받아 선조로부터 예양군에 임명되었으며, 직접 하사받은 글을 받기도 했습니다.
장흥 임씨의 유적과 전통
장흥군 관산읍 옥당리 당동마을은 시조 임호가 처음 정착한 곳이며, 공예태후의 출생지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이에 따라 장흥 임씨는 장흥에서 가장 오래된 토착 성씨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당동마을에는 공예태후의 생가 터가 있으며, 이를 보존하기 위해 6천여 평의 부지를 매입하고 10억 원을 들여 1999년 6월 ‘정안사’라는 이름으로 복원하였습니다.
장흥 임씨는 처음에는 도암면 만덕리 해창 일대에서 생활을 시작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이후 후손들이 강진, 칠량면, 신전면 등으로 분포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눌의 증손자인 임자영은 임진왜란에 참전하여 큰 공을 세웠으며, 이에 대한 보상으로 임금으로부터 도암면 만덕리의 백련사 인근 29만 평의 산을 하사받았습니다. 현재까지도 이 산은 종친들에 의해 관리되고 있습니다.
장흥 임씨의 시제는 매년 음력 10월 15일 도암면 만덕리 신평마을 옆 제각에서 진행됩니다. 이 행사는 문중 종친회를 겸하여 열리며, 전국 각지의 후손들이 참석하여 강진에서 처음 생활을 시작한 눌부터 시조까지 제사를 올리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