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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계 정씨 항렬 족보 시조 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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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계정씨의 유래와 주요 인물
초계정씨의 시조 정배걸은 1017년(현종 8년) 문과에서 장원급제하여 예부상서와 중추원사를 지냈습니다. 그는 경상남도 합천군 초계면에서 태어나 성장하였고, 이후 초계군에 봉해졌습니다. 이로 인해 후손들이 초계를 본관으로 삼았습니다.

 



정배걸은 개인 서당을 열어 많은 제자를 가르쳤으며, 문종 이후 개경의 12사학 중 하나인 홍문공도를 형성하였습니다. 이는 12공도 중에서도 문헌공도와 함께 후진을 양성하는 데 큰 업적을 남겼습니다. 이후 초계정씨는 내급사공파, 천호장공파, 대제학공파, 박사공파, 대사성공파 등 5개 파로 나뉘었습니다.

 



고려 시대의 주요 인물
정배걸의 아들 정문은 예종 때 형부상서와 정당문학을 지내며 문명을 떨쳤습니다.

4세손 정 영은 전중내급사를 지냈으며, 그의 후손들은 내급사공파로 이어졌습니다. 또한, 정윤기는 고려에서 이부상서를 지냈으나 고려가 멸망하자 남쪽으로 망명하여 해남파의 시조가 되었습니다.

다른 정윤기(同名)는 대제학을 지내며 대제학공파의 중조가 되었습니다.

 



조선 시대의 주요 인물
정 화는 1583년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에 등용되었습니다. 이후 감찰, 형조좌랑, 광주판관을 거치며 왜군을 격퇴한 공으로 중화부사에 올랐습니다. 이후 대사간과 공조참판을 역임하였으며, 1617년 폐모론이 일어나자 스스로 양양부사로 나갔다가 1년 만에 사퇴하였습니다. 1623년 인조반정 이후 대사성 겸 동지경연이 되었으며, 대사헌과 우참찬 등을 지냈습니다.

정 온은 성품이 곧고 절개가 높은 인물로 유명합니다. 그는 진사 정유명의 아들로, 광해군 때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사서, 정언 등을 거쳐 부사직에 올랐습니다. 그러나 광해군의 비위를 거슬러 제주도로 유배되었으며, 그곳에서 10년 동안 귀양살이를 하였습니다. 유배 생활 중 **‘망북두시’와 ‘망백운가’**를 남겼습니다.

인조반정 이후 석방된 그는 경상도 관찰사, 부제학을 거쳐 이조참판에 올랐습니다. 병자호란이 발생하자 김상헌 등과 함께 화친을 반대하였으나, 결국 화의가 성립되자 벼슬을 버리고 덕유산에서 은둔 생활을 하였습니다.

정 온은 스승인 정인홍이 대북파의 권력자가 되자 절교하였지만, 그가 참형을 당한 후에는 시신을 수습하여 장사지냈습니다.

조선 후기의 주요 인물
정윤영(1833~1898)은 1881년 전국적으로 전개된 신사척사운동에서 **‘척화만인소’**를 작성하는 등 척사론을 주도한 핵심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경기도 화성시 송산면에서 초계정씨 만주공파 후손으로 태어났으며, 당시 경기도를 대표하는 유학자로 꼽혔습니다.

정윤영은 예리한 현실 인식과 뛰어난 문장력으로 척사운동의 배후에서 상소문의 기초부터 마무리까지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습니다. 그가 제시한 ‘의만언봉사’ 22조에서는 당파, 지역, 문벌 등에 따른 차별을 비판하고 능력 있는 인재를 고루 등용할 것을 주장하였습니다. 이는 보수 유림으로서는 매우 파격적인 개혁론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결론
초계정씨는 고려 시대부터 조선 후기까지 정치, 학문, 군사 분야에서 많은 인재를 배출하였습니다. 개경의 12사학 중 하나인 홍문공도를 형성하며 학문 발전에 기여하였고, 조선 시대에는 절개와 학문을 중시하는 인물들이 배출되어 유림 사회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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